미약한 원두 커피문화
그가 커피에 빠져든 당시 한국에서 원두커피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인스턴트 커피가 그 후 우리나라 커피문화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정자옥(丁字屋)이라는 원두커피 전문점이 서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해방 후 신촌에 있던 <콜롬비아>도 원두커피로 유명한 업소였다. 하지만 그가 막 커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80년대에는 원두커피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사라져 버린 후였다.
일본까지 건너가 애써 익히고 돌아온 커피기술도 그냥 사장될 판이었다. “원두커피를 판매하려면 추출을 할 수 있는 기술자가 필요한데 업주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더구나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은 때였으니까요. 반면 인스턴트 커피는 간편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맛이 되어 원두커피시장이 쇠퇴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일본 커피전문서로 홀로서기
동서식품과 1968년에 이미 ㈜대상의 전신인 미주산업(MJC) 등이 인스턴트커피로 커피 시장을 장악한 상태에서 커피를 탐구하고자 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름의 커피문화를 꽃 피운 일본의 전문 서적을 통해 혼자서 공부를 이어나가는 것뿐이었다. 일본에서 오랜 생활을 해온 덕에 일본어가 친숙했던 지라 책을 통한 공부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지만,
추출한 커피의 맛에 대해 함께 평가하고 의논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홀로 수많은 커피를 매일같이 직접 마셔가며 원두커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끊임없이 커피에 대해 파고 들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한 번 커피숍을 열어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테이블을 여섯 개 정도 놓을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꿈꾸며 더치커피기구, 사이폰 등 여러 추출기구를 일본에서 힘들게 들여왔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번은 삼풍백화점에 입점하고자 담당자와 미팅도 가졌지만 <카페 라리>가 그 자리를 대신 꿰차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이에 대한 마음을 접고 여러 지역의 커피숍을 돌아다니던 박상홍 선생은 어느 날 우연히 박이추 대표의 <보헤미안>을 방문하게 되고, 이곳에서 고 박원준 선생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커피 1세대와의 만남
박이추 대표와 가까워지면서 보헤미안에 앉아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박대표가 역촌동 부근 지인의 가게를 인수하게 됐는데,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던 박상홍 선생은 ‘보헤미안에 방문하는 이들은 당신의 얼굴을 보러 오는 거다. 두 집을 어떻게 함께 운영할 수 있겠냐’며 그의 부인에게 커피를 가르쳐 운영을 맡길 것을 권했다.
그리고 나흘 뒤, 박이추 대표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가르치는 게 힘들어서 도무지 안 되겠으니 자신의 부인에게 커피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박선생은 박이추 대표의 부인에게 직접 커피를 가르치게 됐다.
이때 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해 유럽식 원두커피를 접해본 사람들이 점차 늘었고, <난다랑>, <자뎅>, <미스터커피> <왈츠> <사카> 등의 주도 아래 ‘커피열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보헤미안과 카페 라리 등 정통 원두커피전문점들 역시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 원두커피시장이 활기를 띠기시작했다(시리즈3으로 이어집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2019-03-23
좋아요(0)매우 흥미롭게 글을 읽었습니다
2019-03-05
좋아요(0)보헤미안과 카페 라리
추엌입니다
2019-03-04
좋아요(0)직접 뵌적이 있습니다♡
2019-03-04
좋아요(0)우리나라의 커피역사여행을 한것 같습니다.쇠퇴하게 됐던 원두커피의 맥을 묵묵히 이어서 커피문화를 발전시키신 분이네요~
2019-02-28
좋아요(0)누구보다 빠르게 커피를 접하고 문화를 선도하신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흥미롭네요 :)
2019-02-26
좋아요(0)아직도 인스턴트커피는 큰 규모이지만, 이러한 분들의 노력들이 지금 스페셜티커피가 인스턴트 커피의 규모를 줄이고 수준 높은 커피 문화를 자리잡게 했네요~
2019-02-25
좋아요(0)한국 커피역사를 다 보낸 분이시네요..대단하십니다^^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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