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곱게 끼워 말린 것처럼 잎의 모양새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흰 모란 한송이가 핀 듯 아름답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백목단(白牧丹), 채 펴지지 않은 싹들이 보드라운 솜털 아래서 단잠을 자고 있는 듯한 백호은침까지. 백차들은 그 모양새만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우아하다. 백차의 자태에 매혹된 유럽의 차 애호가들은 백차를 그대로 마시기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홍찻잎에 몇 이파리 섞어 대접할 만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때의 관습이 남아 유럽 차 회사들의 블렌디드 티에는 차 맛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양의 백호은침 찻잎이 몇 가닥씩 드문드문 들어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매장에서 가장 비싼 차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맛일까 싶지만 지금까지 백차를 마셔본 적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실망할지도 모른다. 간혹 비리기까지한 약간의 풋내와 맹물에서도 충분히 느낄 법한 단맛이 나서 어쩌면 ‘주인이 깜빡하고 찻잎을 넣지 않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마치 평양냉면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맹숭한 첫인상과 시나브로 스며들어 이내 매혹된다는 점에서 냉면과 백호은침의 물성은 다소 닮았다. 이 둘 모두 처음 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신기한
문헌에 백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명(明)대 말엽, 전 세계 모든 상인의 관심이 홍차와 청차의 고향인 중국 복건성에 모이던 시기였다. 같은 복건성이지만 무이산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해안가인 복정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백차 또한 이들의 동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백차’라는 단어 자체는 당대에 저술된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인 육우(陸羽,?~804)의 『다경(茶經)』에도 나오며, 차와 예술을 너무나 사랑하여 송(宋)을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휘종(徽宗, 1082~1135)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에도 그가 가장 아끼던 백차라는 차에 관한 서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근거로 백차가 천 년을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차라 주장하지만, 사실 육우와 휘종이 언급한 백차는 차나무 품종의 이름일 뿐이다. 백차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된 것은 오래지 않은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는 아마 기록에 적힌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차나무를 재배하던 농민들 중심으로 찻잎을 백차로 만들어 마셨을 거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차는 제다법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간단한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차이기 때문이다.
차를 제조하기 위한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고 언뜻 만들기가 간단하고 수월해 보이기에, 과거 대량 생산을 목표로 설립된 티 플랜테이션들이 2000년대 이후 극적으로 변한 시장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초석으로 백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도와 스리랑카, 케냐를 비롯해 차나무가 자라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품종의 백차를 만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고 1999년 문을 연 잉글랜드 남부의 트레고스난Tregothnan 다원 또한 백차로 유명하다. 하지만 인위적
언젠가부터 중국의 차 시장에서 백차를 찾으면 상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1년이면 차요, 3년이면 약이고 7년이면 보물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백차는 주로 낱잎 형태로 유통되어 해차로 판매됐다. 최근에는 동글납작한 병차 형태부터 네모난 초콜릿 모양까지 다양한 모습의 긴압차(緊壓茶)1)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이를 권하는 차상들은 위와 같이 말하며 백차는 오래 숙성시켜 마실수록 몸에도 좋고 맛도 빼어나다고 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보이차가 재테크 수단으로 부상하며 제2, 제3의 보이차를 찾고자 하는 투자자들이 장기 숙성이 가능한 차에 관심을 갖게 되며 생긴 유행의 일부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오래 보관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보이차에 비해 녹차처럼 해차로만 유통되는 차들은 상인들의 입장에서 재고부담이 응당 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오래 둘수록 좋다고 홍보하면 소비자들에게 더 많이 판매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흐름인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 묵힌 백차의 장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신선한 차의 풋풋한 내음이 떠난 자리에 깊고 진득한 단맛이 채워진다. 단단하던 떫은맛이 차츰 부드러워져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므로 차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에게 가벼이 추천할 만하다. 해차와 묵은 차는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오래된 백차의 달콤함이 좋다면 넉넉히 사서 두고 마시고, 해차의 맑고 은근한 우아함을 즐기고자 한다면 제철에 구매하여 가급적 빠르게 소비하면 된다. 해차를 사서 차가 천천히 변화하는 모습을 탐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향을 발견하는 일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기보다 나는 어떤 맛과 향을 좋아하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차를 마시는 즐거움 중 하나이기에.
Writer / Photo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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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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