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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가장 널리 사랑받는 차

커피스터디

홍차, 가장 널리 사랑받는 차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녹차는 동아시아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차다. 현재 차 생산량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차 역시 녹차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차 또한 녹차일까?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다. 여섯 가지 차 종류 중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차는 바로 홍차다. 이번 시간에는 지구상에서 물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는 음료인 홍차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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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홍차는 없다
 

‘홍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마 영국일 것이다. 영국인들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진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잠들기 전까지 차를 마신다. 과거 동인도회사로 벌어들인 모든 부를 중국에서 온 바싹 마른 이파리를 사는데 쏟아부었던 영국은 은이 모자라자 아편을 대금으로 내밀어 전쟁조차 마다하지 않을 만큼 차에 미쳐 있었다. 현재 전 세계 홍차 시장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대다수의 티 팩토리는 대부분 영국인의 손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중반에 고안한 기계들은 아직까지도 거의 모든 차 산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티 테이스팅 도구와 방법을 만들어낸 것도 영국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차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 전체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영국 홍차가 없다니, 무슨 말일까?

‘영국 홍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어떤 모습이 보이는가? 고운 테이블보가 깔린 티 테이블 위로 잘 관리돼 반짝이는 실버 커트러리와 티 포트가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웨지우드Wedgwood’나 ‘로열 크라운 더비Royal Crown Derby’ 사의 것로 짐작되는 얇은 본차이나Bone China)티컵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3단 트레이에 놓인 접시에는 테두리를 깔끔하게 잘라낸 샌드위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콘이 있으며 가장 윗단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한입 크기 디저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홍차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꿈꿀 찻자리 풍경이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한복을 갖추어 입고 궁중음식을 차려 먹지 않듯, 실제 영국인들의 일상에 자리한 차 문화는 위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영국 사람들은 보통 ‘테스코Tesco’를 비롯한 여러 대형마트에서 파는 100개들이 벌크 티백을 애용하며 티 포트마저도 번거로워 큼직하고 둔탁한 머그잔을 사용한다. 컵에 티백 몇 개를 대충 던져 넣은 다음 시계 따위엔 눈길도 주지 않고 적당히 우러났다 싶으면 우유와 설탕을 넣어 묽은 미음처럼 걸쭉해진 ‘차탕’을 저어 마신다. 이마저도 귀찮은 이들은 물을 끓이는 대신 머그컵째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도 한다. 상상 속의 호화스러운 애프터눈 티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호텔이나 관광지에나 가야 즐길 수 있다.

한국의 차 애호가들이 가지고 있는 홍차에 대한 환상은 대체로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서 근대 이전까지 차란 언제나 상류층들이 향유해 온 특수한 문화였다. 그렇기에 영국에서 건너온 홍차 또한 그 품질과는 상관없이 서구의 화려한 문화를 대변하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사치품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같은 섬나라로서 일본이 영국에 가지고 있는 서구 사대주의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지금도 일본의 호텔과 홍차 전문점에서는 유럽 그 어느 곳에서보다 훨씬 섬세하고 호사스러운 티 타임을 만끽할 수 있다.

오서독스와 씨티씨

21세기에 접어들며 영국에도 백차 등을 중심으로 차를 소량 생산하는 다원이 생겼다지만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은 영국에선 차를 재배하기 어렵다. 우리가 흔히 영국 홍차라고 부르는 깊고 붉은 수색의 차를 만나려면 과거 그들이 식민 지배했던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아프리카의 더운 나라로 가야 한다. 홍차를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보급하는 것은 대영제국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도 이들은 전장 최전선에서조차 따뜻한 홍차 한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적도 위아래로 따듯하고 비가 넉넉히 오는 비옥한 식민지 땅에 차나무를 심었다. 현지의 자연환경과 저렴한 노동력 그리고 서구의 기술과 자본이 결합해 너른 땅에 상품성이 빼어난 작물 한 가지를 빽빽이 모아 심는 농업 방식을 ‘플랜테이션Plantation’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차농이 소규모로 차를 만들어 파는 것과는 규모도 형태도 완전히 다르다.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 Mason’이나 ‘위타드 오브 첼시Whittard of Chelsea’ 등 영국 티 브랜드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홍차는 대규모 티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렇게 공장화된 농원에서 생산되는 차들은 장인의 손에서 귀하게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녹차만큼 빼어나지는 않지만 품질이 균일하고 안정적이며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녹차와 홍차는 각각 동과 서의 차 문화를 대표하는 차라는 것 외에 제다 방식에 있어서도 대척점에 자리하고 있다. 여섯 가지 차를 분류하는 가장 큰 기준이 산화라는 것을 지난 기사에서 녹차를 설명하면서 말했다. 녹차는 솥에 덖거나 증기로 찌는 등 찻잎에 열을 가해 산화를 가급적 억제시킨 차다. 이에 반해 홍차는 찻잎을 최대한 많이 산화시켜 만든다.

티 플랜테이션에서의 아침 풍경은 녹차를 따는 차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채엽은 보통 이른 아침에 끝나며 찻잎의 무게에 따라 티 플러커Tea Plucker)들의 품삯이 책정된다. 차를 가공하는 기계들은 주로 공장의 1층에 모여있다. 2층부터는 ‘위조(萎凋)Withering’를 위한 공간이다. 위조란 찻잎을 시들리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차의 향미가 더욱 깊어지며 이어지는 유념 과정에서 찻잎이 더 잘 비벼진다. 위조에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래로 바람이 통하게끔 상판 대신 그물망을 씌운 테이블에 채엽한 찻잎을 도톰하게 깔고 시시로 뒤집어준다. 인도 다르질링의 경우 봄의 위조 작업은 보통 정오께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 무렵까지 이어진다. 위조가 끝난 다음은 ‘유념(揉捻)Rolling’이다. 유념은 찻잎을 비비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홍차에서의 유념은 찻잎의 모양을 잡고 차가 잘 우러나게 하기 위한 녹차의 유념과는 목적이 조금 다르다. 찻잎의 세포막을 터뜨려 찻잎 속의 산화 효소가 최대한 활성화되게끔 하기 위한 것으로 그 시간과 강도가 길고 강할수록 찻잎의 산화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흔히 떠올리는 붉고 깊은 수색을 띠기 위해서는 매우 강하게 비벼야 하므로 홍차는 보통 손이 아닌 기계로 유념한다. 잘 비벼져 차즙으로 진득해진 찻잎을 적절한 온도와 습도로 맞춘 공간에 두면 처음엔 어두운 올리브 색이었던 찻잎이 서서히 붉고 검은 빛으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산화 과정이 완료된 찻잎은 건조 과정을 거치면 검게 윤이 나는 홍찻잎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오서독스 제법Orthodox Method’이라고 한다.

홍차가 처음 만들어진 중국 복건성의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오서독스 제법은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차의 양이 제한적이고 시간도 거의 이틀이나 걸렸다. 영국인들은 나날이 늘어가는 홍차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씨티씨 제법CTC Method’이다. 찻잎을 비비지 않고 칼날이 달린 두 개의 롤러 틈으로 넣어 부수고(Crush) 찢고(Tear) 말아서(Curl) 홍차를 만드는 이 방식은 1930년대 이후 티 플랜테이션의 대량 생산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차를 만드는 시간이 3분의 1로 줄어든 것은 물론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이 10배 이상 늘었다. 이러한 기술의 혁신에 힘입어 과거 소수의 특정 계급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차 문화는 그 중심을 홍차로 옮겨와 이윽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게 됐다.


홍차 맛 홍차, 브렉퍼스트 티

세계 어느 티 브랜드를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홍차 한 가지를 추천해달라 하면 브렉퍼스트 티를 꼽을 것이다. 흔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차는 말 그대로 영국 사람들이 아침 식사에 곁들이는 차다. 하지만 꼭 아침에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영국에서만 파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산지에서 수확된 홍찻잎을 두루 섞어서 만드는 블렌디드 티의 한 종류로, 홍차 전문점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기본 구성이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흔한 홍차의 이름이지만 회사마다 각자 다른 레시피로 만들어지기에 마스터 블렌더는 차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아 심혈을 기울여 만든다. 어떤 티 브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 회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차를 고르고 블렌딩하는지 파악하고 싶다면 브렉퍼스트 티를 고르면 된다. 브렉퍼스트 티는 브랜드의 심장이자 아이덴티티 그 자체이다.

고전적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주로 영연방에 속한 인도 아삼과 케냐 그리고 스리랑카 지역의 자잘한 찻잎을 섞어 만든다. 우유나 설탕을 넣어도 밀리지 않게끔 향미가 진하고 강건한 ‘풀 바디Full-Body’다. 이제 영국에는 홍차를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도, 가공 시설도 없지만 과거 미지의 땅에서 차밭을 개척한 모험심 강한 영국인 차농들의 활약은 지금까지 남아 위의 세 나라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유지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라는 이름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지금 브렉퍼스트 티를 우려 당신에게 주고 어떤 맛이 나느냐고 물으면 그냥 홍차 맛이라고 대답할 테다. 요즘이야 각 산지의 농원 이름을 붙인 싱글 배치Single Batch 차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대영제국 시절부터 지금까지 유통되는 대부분의 홍차는 블렌디드 티였으며 그 중심에는 브렉퍼스트 티가 있었다. 오랜 세월 쌓인 집단 취향의 결청제이다 보니 브렉퍼스트 티는 말 그대로 ‘홍차 맛 홍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차의 가장 큰 매력 또한 그 보편성에 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영국식 아침 식사로 달걀 프라이와 소시지, 잼을 바른 토스트와 함께 진한 홍차 한잔 곁들여 보면 어떨지. 영국인들에게 홍차란 우아한 삶의 쉼표가 아니라 짜고 기름진 식사에 부담 없이 어우러지는 맑은 된장국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다.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 일상의 맛이다.


글. 사진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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