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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익숙하고도 낯선

커피스터디

녹차, 익숙하고도 낯선
차는 어떻게 만드는지에 따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뉜다. 이들을 구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산화’, 그중에서도 효소에 의한 산화다. 즉, 푸른 이파리가 유지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붉은빛이나 짙은 갈색으로 만들 것인지에 따라 제다 방식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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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군림한 차의 황제

여섯 가지 차 이야기를 어떤 순서로 풀어나갈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첫 순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녹차는 차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수천 년을 거쳐 현재까지 내려온 유일무이한 차다. 17세기 이전까지 기록된 모든 차의 역사는 곧 녹차의 역사이기도 하다. 모든 차를 만들어낸 차의 고향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를 생산하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차 또한 녹차다. 중국 전체 차 생산량의 70% 그리고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는 녹차는 중국차의 영혼이자 대들보라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웃 나라들에 비하면 생산량과 소비 규모에서는 다소 밀리지만 우리나라 또한 천 년 넘게 차나무를 재배해 온 당당한 차 문화권 국가다. 이를 지탱하는 하동이나 보성 그리고 제주의 차밭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차는 녹차다. 불교가 쇠락하며 사찰과 함께 산으로 숨어들게 된 우리나라의 차와는 달리, 일본은 동아시아의 세 나라 중 가장 늦게 차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내 독자적인 모습으로 차를 정착시키고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게 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차라고 하면 대다수는 녹차를 떠올린다.


덖거나 찌거나

녹차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찻잎을 가급적 산화시키지 않고 선명한 초록빛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듯 산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려면 열을 가해 잎의 내부 온도를 높여야 한다. 차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불을 지펴 뜨겁게 달궈진 솥에 찻잎을 넣고 덖는 것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녹차를 제다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인 살청(殺靑)이다.
찻잎을 따는 것은 보통 이른 시간에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뜨기 전 끝나곤 한다. 사실상 산화는 이파리를 따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신속하게 살청해야 생엽 고유의 싱그러움을 유지할 수 있다. 뜨거운 솥에 덖어 김이 폴폴 나는 찻잎들은 일단 빠르게 식혀야 하므로 대나무 채반이나 돗자리 위에 올려 재빠른 손놀림으로 털어준 다음 가볍게 비벼 모양을 잡는다. 이를 ‘비비기’ 혹은 ‘유념(揉捻)’이라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찻잎 내부의 성분이 고루 우러나게 하는 동시에, 모양을 잡고 부피를 줄여 포장과 유통의 효율성을 높인다. 이제 마무리로 찻잎을 건조하기만 하면 끝이다.

앞서 서술한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녹차의 제다 과정이다. 이처럼 솥에 덖어 낱잎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살청 방식을 사용한 녹차를 ‘덖음차’ 혹은 ‘초청(炒靑) 녹차’라 한다. 초청 기술은 명대 이후로 정착된 제다 방식으로, 오늘날 중국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녹차를 솥에 덖어 만든다. 그에 반해 일본은 좀 더 오래된 제다법을 따라 찻잎에 뜨거운 증기를 쐬어 살청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를 증청(蒸靑) 녹차라고 한다. 초청 녹차에 비해 잎의 모양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단시간에 균일하게 살청할 수 있어 대량 생산에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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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우전 그리고 교쿠로

녹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봄이 돌아오길 애타게 바란다. 계절을 기다린다기보단 햇차를 기다리는 쪽에 가깝다. 따뜻하고 습한 나라에서 태어난 차나무가 먼 서쪽 땅에서 건너와 혹독한 추위에 적응하며 겨울을 버티고, 마침내 새순을 틔우는 모습은 경이로움을 뛰어넘어 때로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봄소식은 중국에서 먼저 접한다. 주요 차 생산지가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낮은 따뜻한 지역에 자리한 중국에서는 3월 말엽 첫 싹을 수확한다. 4월 5일 무렵의 청명(淸明) 이전 이른 봄에 따는 차를 귀하게 여기는데, 이를 명전(明前)이라 부른다. 이 시기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차는 절강성 항주의 서호 인근에서 나는 용정(龍井) 녹차다. 건조 과정에서 찻잎을 솥에 지그시 누르기 때문에 멜론씨처럼 길쭉하고 납작한 모양새다. 찻잎이 물을 머금으면 서서히 일어나 살며시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개화하는 꽃처럼 우아하다. 수색은 몹시 엷지만 맑고 청아한 맛 뒤로 진득한 콩고물 내음이 따라붙는다.

우리나라 하동이나 보성은 항주에 비해 다소 쌀쌀하기 때문에 한 달 뒤인 4월에서야 첫 채엽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곡우(穀雨)인 4월 20일 무렵 이전까지 따는 차를 우전(雨煎)이라 하며 가장 귀하게 여긴다. 우리 녹차의 맛은 담박하고 개운하여 쉬이 질리지 않는다. 같은 초청 녹차지만 용정에 비하면 좀 더 마시기 편하고 소슬한 단맛이 입안에서 경쾌하게 찰랑인다. 한 해의 첫 차인 우전은 좀 더 맑지만 은미하고 고아한 운치가 있다. 곤히 잠든 아가의 숨결처럼 달콤한가 하면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양 그리운 향내를 품고 있다.

일본 다도에서 주로 사용하는 차는 곱게 가루 낸 말차(抹茶)지만 낱잎으로 된 차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은 교쿠로(玉露)다. 차라기보다 마치 육수와 같은 진한 감칠맛을 지닌 이 차는 모든 차 중에서 가장 낯설고 이질적이다. 익히 알고 있는 녹차의 풍미가 아닌 교쿠로 특유의 짭조름한 해조류 내음을 처음 접한 사람이 더는 못 마시겠다며 찻잔을 밀어내는 일도 종종 있다. 이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차에 대한 맛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감칠맛이 진하고 깊을수록 고급스러운 차로 여긴다. 찻잎에서 감칠맛을 내는 성분은 아미노산의 일종인 테아닌Theanine으로, 싹이 돋을 무렵 햇볕을 가려 차나무를 키우면 탄소 대사 대신 질소 대사가 활발해져 테아닌이늘어나게 된다. 또한 부족한 햇빛을 충분히 받고자 찻잎은 더욱 짙은 초록빛을 띠며 잎의 조직도 부드러워진다. 20일간 차광재배하여 자란 교쿠로에선 짙은 녹음과 먼 바다가 함께 연상된다. 꿀꺽꿀꺽 마시는 대신 입안에 조금씩 머금고 혀 위로 굴리며 완상하는 맛이다.


 
오래된 미래

녹차는 오랜 시간 가까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다소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녹차는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차로 부상 중이다. 영국의 ‘해러즈Harrods’ 백화점 차 코너의 티 리스트에서 가장 윗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녹차이며, 프랑스 ‘마리아주 프레르Mariage Freres’에서는 한국의 녹차를 고급스러운 패키지에 담아 소개한다. 한동안 유럽의 홍차 문화에 열광하던 일본도 최근에는 자국의 녹차에 차를 만든 사람의 이름과 차나무 품종을 달아 스페셜티 제품군으로 판매한다. 이러한 시류를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우리 녹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흘러간 전통 문화로만 인식되던 녹차가 이제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브랜딩을 입고 예약 없이는 방문하기 힘든 세련된 티룸에서 서비스된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오래된 미래’라 부른다. 수천 년 동안 사랑받아 온 녹차의 저력이 이제 다시 그 힘을 발휘할 때라 생각한다. 봄이 돌아오면 나들이 삼아 남쪽의 차밭으로 떠나보길. 싱그러운 새순들에 실린 오랜 이야기에 푹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글, 사진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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