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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차

커피스터디

백차
“여기서 가장 비싼 걸로 주세요.” 누구나 한번은 대로변에 자리 잡은 아주 근사한 가게에서 메뉴판을 펼치지 않고 주문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만약 유럽의 티룸이나 티하우스를 방문해 이렇게 말한다면 높은 확률로 곱고 빽빽한 흰 털이 덮인 곧고 긴 찻잎을 만나게 된다. 은빛 바늘을 닮았다 하여 서구에서는 ‘실버 니들Silver Needle’이라고 불리는 이 차의 본래 이름은 백호은침(白毫銀針), 여섯 가지 차의 분류로 나누자면 백차에 해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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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계의 평양냉면
 

책갈피에 곱게 끼워 말린 것처럼 잎의 모양새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흰 모란 한송이가 핀 듯 아름답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백목단(白牧丹), 채 펴지지 않은 싹들이 보드라운 솜털 아래서 단잠을 자고 있는 듯한 백호은침까지. 백차들은 그 모양새만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우아하다. 백차의 자태에 매혹된 유럽의 차 애호가들은 백차를 그대로 마시기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홍찻잎에 몇 이파리 섞어 대접할 만큼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때의 관습이 남아 유럽 차 회사들의 블렌디드 티에는 차 맛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양의 백호은침 찻잎이 몇 가닥씩 드문드문 들어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매장에서 가장 비싼 차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맛일까 싶지만 지금까지 백차를 마셔본 적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실망할지도 모른다. 간혹 비리기까지한 약간의 풋내와 맹물에서도 충분히 느낄 법한 단맛이 나서 어쩌면 ‘주인이 깜빡하고 찻잎을 넣지 않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마치 평양냉면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맹숭한 첫인상과 시나브로 스며들어 이내 매혹된다는 점에서 냉면과 백호은침의 물성은 다소 닮았다. 이 둘 모두 처음 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들 한다. 신기한

것은 그 ‘무미무취함’에 끌려 백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더 마시다 보면 어느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목련 봉오리인지 난인지 모를 맑은 꽃 향이 잔잔하게 번져온다. 달큼한 꿀 내음 뒤로 설핏 숨어든 스파이스의 알싸한 자취조차 기이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맹물을 마셔보지만 심지어 여기서도 차 맛이 나는 듯하다. 물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도 혀에 단맛이 엉켜 침을 삼킨다.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도 어쩐지 머리 위에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치 한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깊은 밤, 낡은 우물 바닥에 휘영청 뜬 달을 길어 한 모금 마신 듯 차고 달다. 백차의 맛에는 아기의 말갛고 푸른 눈동자부터 노인의 지혜로운 눈빛까지 모두 담겨 있다.


무위자연의 차
 

문헌에 백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명(明)대 말엽, 전 세계 모든 상인의 관심이 홍차와 청차의 고향인 중국 복건성에 모이던 시기였다. 같은 복건성이지만 무이산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해안가인 복정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백차 또한 이들의 동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백차’라는 단어 자체는 당대에 저술된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인 육우(陸羽,?~804)의 『다경(茶經)』에도 나오며, 차와 예술을 너무나 사랑하여 송(宋)을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휘종(徽宗, 1082~1135)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에도 그가 가장 아끼던 백차라는 차에 관한 서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근거로 백차가 천 년을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차라 주장하지만, 사실 육우와 휘종이 언급한 백차는 차나무 품종의 이름일 뿐이다. 백차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된 것은 오래지 않은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는 아마 기록에 적힌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차나무를 재배하던 농민들 중심으로 찻잎을 백차로 만들어 마셨을 거라 짐작한다. 왜냐하면 백차는 제다법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간단한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차이기 때문이다.

백차를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이른 봄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깬 어린싹과 이파리를 상처라도 날 새라 조심스럽게 따서 대나무 자리 위에 사뿐히 앉힌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천천히 말리기만 하면 끝이다. 백차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날그날의 햇살과 바람이다. 사람의 손이 최대한 닿지 않게끔 공정을 간소화하고 차가 본래 지닌 품성이 자연스레 드러나기를 기다린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찻잎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자 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차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옛 도가(道家) 사상가들이 백차를 알았다면 그들이 꿈꾸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이 담긴 차라며 찬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제조하기 위한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고 언뜻 만들기가 간단하고 수월해 보이기에, 과거 대량 생산을 목표로 설립된 티 플랜테이션들이 2000년대 이후 극적으로 변한 시장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초석으로 백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도와 스리랑카, 케냐를 비롯해 차나무가 자라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품종의 백차를 만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고 1999년 문을 연 잉글랜드 남부의 트레고스난Tregothnan 다원 또한 백차로 유명하다. 하지만 인위적

인 과정이 절제된다는 것은 그만큼 기후나 날씨처럼 사람이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찻잎이 눌려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한꺼번에 듬뿍 따서 담아올 수 없다. 펼쳐 널어두어야 하므로 만드는 양에 비하면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비라도 내릴 듯싶으면 재빨리 거두어 집 안으로 들여야 한다. 백차 중 가장 귀하다는 백호은침에 이르면 ‘십불채(十不采)’, 즉 찻잎을 딸 때 피해야 하는 열 가지 규칙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백차는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고 걸리는 시간도 녹차나 홍차에 비해 긴 편이라 어느 차 가게에 가더라도 카탈로그 가장 위 고가 제품군에 속해 있다. 약간의 수고로움만 감수한다면 추가 설비 투자 없이 만들 수 있는 고부가가치를 지닌 차이기에 앞으로도 백차를 생산하는 산지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3년이면 약, 7년이면 보물?
 

언젠가부터 중국의 차 시장에서 백차를 찾으면 상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1년이면 차요, 3년이면 약이고 7년이면 보물이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백차는 주로 낱잎 형태로 유통되어 해차로 판매됐다. 최근에는 동글납작한 병차 형태부터 네모난 초콜릿 모양까지 다양한 모습의 긴압차(緊壓茶)1)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이를 권하는 차상들은 위와 같이 말하며 백차는 오래 숙성시켜 마실수록 몸에도 좋고 맛도 빼어나다고 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보이차가 재테크 수단으로 부상하며 제2, 제3의 보이차를 찾고자 하는 투자자들이 장기 숙성이 가능한 차에 관심을 갖게 되며 생긴 유행의 일부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오래 보관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보이차에 비해 녹차처럼 해차로만 유통되는 차들은 상인들의 입장에서 재고부담이 응당 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오래 둘수록 좋다고 홍보하면 소비자들에게 더 많이 판매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흐름인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 묵힌 백차의 장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신선한 차의 풋풋한 내음이 떠난 자리에 깊고 진득한 단맛이 채워진다. 단단하던 떫은맛이 차츰 부드러워져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므로 차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에게 가벼이 추천할 만하다. 해차와 묵은 차는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오래된 백차의 달콤함이 좋다면 넉넉히 사서 두고 마시고, 해차의 맑고 은근한 우아함을 즐기고자 한다면 제철에 구매하여 가급적 빠르게 소비하면 된다. 해차를 사서 차가 천천히 변화하는 모습을 탐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향을 발견하는 일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기보다 나는 어떤 맛과 향을 좋아하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 또한 차를 마시는 즐거움 중 하나이기에.


 

Writer / Photo <티에리스> 정다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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