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 양수리 여름밤
브룽브룽|작성일 : 19-04-17|조회수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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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정말 봄을 넘어서 초여름 같습니다.
혹시 책 읽기 좋아하시는 회원분도 계신지 궁금하네요.
갑자기 찾아온 여름에 문득 최근에 읽은 시 한편이 생각나서 뜬금없지만 적어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기택 시인의 양수리 여름밥 이라는 시입니다.
양수리 여름밤
양수리 어느 시인의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글자들 사이에 자주 조그만 얼룩들이 생긴다.
얼룩은 점점 많아진다.
책에 모기 물린 자국이 가득하다.
글자들이 시원해지도록 책을 벅벅 긁어준다.
창마다 모기창이 있지만
모기장보다 더 작은 날벌레들이
때론 모기장으로 들어오기엔 꽤 커 보이는 모기들이
손바닥에서 짓이겨지려고 달려든다.
팔뚝의 검은 반점이 자꾸 꾸물거리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내리쳤더니
그대로 살 속에 박혀 점이 되어버렸다.
여름밤의 글자들은 책 속에 갇혀 있는 걸 싫어해
앵앵거리며 머리 주위를 어지럽게 맴돈다.
너무 작아서
몸뚱이와 날개와 다리가 구분되지 않는
그저 날아다니는 점일 뿐인
눌러 터뜨리면 바로 색즉시공이 되어버리는 날벌레들처럼
글자들은 빛에 땀 냄새에 살갗에 자꾸 붙는다.
모기 물린 자국이 많은 눈과 귀 속으로 한밤의 시냇물이 들어오기도 한다.
시냇물에서 놀고 있는 크고 작은 물굽이들이
물굽이 속에서 지저귀는 온갖 명랑한 소리들이 흘러 들어온다.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맑고 우렁찬
풀벌레 소리도 들어온다.
이 모든 소리들이 스며들어
날개와 다리와 목청이 움직이는 소리들이 남김없이 스며들어
풍성해진 침묵도 들어온다.
혼자 있는 시간이 보약이 되어
약이 잘 듣지 않는 내 몸속으로 쑥쑥 흡수된다.
시골 밤공기에 취해 나는 빈둥거리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나 대신 밤늦도록 책을 읽어주는
양수리 여름밤.
춘곤증에 괜히 졸리고, 쳐지는 날입니다.
시와 함께 커피 한잔 즐기면서 오늘 하루도 다들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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