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무는 하나인데 이름은 여러 개
여섯 가지 차를 구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려진 찻물 빛에 따라 녹차가 되고 홍차가 된다. 어째서 같은 찻잎에서 이렇게 다양한 빛깔이 나오게 되는 걸까. 그 비밀은 ‘산화Oxidation’에 있다. 찻잎에는 항산화 성분으로 알려진 폴리페놀이 잔뜩 들어있다. 차에서 떫은맛을 느낀 적 있다면 그것은 필시 폴리페놀, 그중에서도 차에 가장 많이 든 카테킨Catechin을 맛본 것이다.
본래 무색인 폴리페놀은 세포막 바깥의 효소와 만나 산화되면 처음엔 노랗게 물들었다 이어서 빨갛게, 마지막은 짙은 갈색을 띤다. 깎은 사과가 갈변하는 것도 산화의 일종이다. 다만 단백질로 이루어진 효소는 80℃ 이상의 고온에선 변형돼 제 몫을 하지 못한다. 시장에서 사온 시금치가 처음엔 어둡고 희끄무레한 녹빛이었다가 뜨거운 물에 데치면 빛깔이 선명히 살아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녹차를 만드는 원리다.
다시 말해 녹차는 시금치처럼 열을 가해 가급적 산화되지 않게 만든 차고, 홍차는 마치 사과가 갈색으로 변하듯 찻잎을 자극해 최대한 붉게 산화되도록 만든 차다. 또한 녹차와 홍차 사이엔 백차와 청차가 있으며 이들에서는 미생물에 의한 발효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흑차에서는 발효가 매우 중요하다. 즉, 찻물의 색을 보는 것은 차가 얼마나 산화되었는지 아는 것이다. 이처럼 산화의 정도에 따라 차를 나눈 것이 육대차류다.
중국 사천성에서 시작된 차 문화
차나무가 지구상에 언제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인류의 역사보다는 훨씬 오래되었으리라. 최초의 차 전문 서적인 『다경(茶經)』에 적힌 육우(陸羽, 733~804)의 말에 따르면 처음으로 차를 마신 사람은 고대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 명이자 농업과 의약의 창시자인 신농(神農)이라고 한다. 현재 거의 모든 중국의 차 전문가들 또한 이렇게 말하나 신농의 시대였던 기원전 2700년경의 차나무들은 여전히 운남성과 사천성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주로 활약하던 황하 문명의 중심지는 당시의 차나무가 자라기에는 너무나 추운 지역이기에 과연 그가 차나무를 만난 적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본래 바나나는 씨가 크고 많아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식재료로 흔히 사용하는 대부분의 식물은 재배를 통해 먹을 수 있게끔 순화된 것이다. 차나무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야생 차나무로 차를 만들어 티베트로 보냈더니, 사람들이 복통을 호소해 기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차의 역사는 차나무의 역사가 아니라 차를 재배하고 마시기 시작한 때에서 츨발한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차 역사의 기원은 중국 사천성이다. 동진 시대(344~406)에 상거(常璩)가 쓴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현재의 사천에 해당하는 촉(蜀)에서 주나라 무왕에게 차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1000년경 이 지역에서 차를 재배했다는 것이 짐작 가능한 대목이다.
옛날엔 차를 어떻게 마셨을까
이미지: 중국 차 문화
사천성에서 시작된 차 문화는 중국이 맞은 최초의 안정기인 당(唐)대(618~907)에 만개했다. 차를 말과 교환하는 차마호시(茶馬宋市)가 열렸고 육우가 다경을 집필하면서는 차가 약이나 음료만이 아닌 하나의 문화 예술로 인정받게 된다. 차나무가 해외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3년(828) 당에 파견됐던 대렴(大廉)이라는 인물이 가져온 차 씨앗을 지리산 자락에 심은 걸 첫발로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됐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에서 돌아온 사신들과 승려들을 통해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차 문화가 시작됐다.
차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낱잎 형태였던 것은 아니다. 당대에는 덩어리 형태의 녹차인 단차(團茶)가 등장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맷돌에 갈아낸 가루를 주전자에 넣고 끓여 마셨다. 이를 자차법(煮茶法)이라 한다. 송(宋)대(960~1279)에도 단차를 마셨지만 이 시기 사람들은 차 가루를 탄 물에 차선으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점다법(點茶法)을 즐겼다. 일본 다도의 기반인 말차가 여기서 유래됐다. 한편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평민 출신이었기에 단차를 만들어 바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황위에 오르자 단차를 금했고 그 후로 오늘날과 같은 잎차, 산차(散茶) 형태의 차를 만들게 됐다.
이전까지 차 문화는 오로지 녹차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명대부터 낱잎 형태로 차를 만들게 되며 다양한 제다법이 등장했다. 우리가 하동이나 보성에서 볼 수 있는, 녹차를 만들 때 증기로 찌는 것이 아닌 솥으로 덖는 초청법(秒靑法) 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찻잎을 가루로 내지 않고 낱잎을 우려서 마시는 포다법(泡茶法)이 유행하면서 여러 가지 찻주전자가 고안됐고 중국 장시성 경덕진 등에서 도자기 공예가 발달하게 되는 밑바탕이 됐다.
차가 유럽에 전해지다
차라는 음료가 있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여행자들의 모험담 속에서만 존재하던 차를 유럽 사회에 전파한 이들은 17세기 초반, 당시 누구보다 발 빨랐던 네덜란드의 상인들이다. 유럽에 첫선을 보인 차는 녹차였으며 동아시아에서도 그랬듯 처음엔 약으로 이용됐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통풍과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차를 마셨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초콜릿의 인기에 밀려 차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다.
차에 흠뻑 매료된 이들은 오히려 그동안 유럽 문화의 변방에 있었던 영국과 러시아인들이었다. 차를 사느라 은을 탕진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아편을 판매했고, 이에 중국 정부가 아편을 금지하자 끝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시작이다. 전쟁의 결과 중국은 홍콩을 비롯한 다수의 영토를 잃었고,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꺾인 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러시아는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다. 1689년 중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러시아는 중국에서 직접 차를 사다 나르며 독자적인 차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이때 중국에서 모스크바까지 18,000km의 머나먼 교역로를 오가던 상인들을 러시안 캐러반Russian Caravan이라 불렀다. 현재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홍차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로, 찻주전자가 합쳐진 난방기구인 사모바르Samovar는 러시아 가정 필수품이다.
영국에서 건너간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인들도 처음엔 차를 즐겨 마셨다. 영국이 차에 높은 세금을 매겼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밀수가 성행했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1773년 동인도회사에 차의 전매권을 부여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이것이 식민지 주민들의 반감을 사 보스턴 시민들은 영국 정부의 과세권 철폐를 주장하며 1773년 12월 조례 제정 후 처음으로 도착하는 차 무역선을 급습해 차 상자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렸다. 이것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향후 미국인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유통하는 차를 마시지 않는 대신 아편전쟁을 치른 뒤 영국과 적대국이 된 중국을 통해 차를 직접 교역하게 됐다. 지금도 미국에서 데일리 티로 즐겨 마시는 브렉퍼스트 블렌드는 중국 홍차를 사용하는 것이 많다.